- [골프] 실력·스토리·에티튜드…세계골프계가 일본선수들을 주목하는 까닭-LPGA 블루베이 관전기 [윤영호의 ‘골프, 시선의 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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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치미디어에서 새로 나온 책 ‘골프-골프의 성지에서 깨달은 삶의 지혜’의 감수자인 폴 스튜어트는 거의 모든 골프 대회를 30년째 놓치지 않고 시청하고 있다. 기억력이 뛰어난 그는 26년 전 스코틀랜드 카누스티에서 열린 디오픈 마지막 라운드를 어제 경기처럼 또렷이 기억한다.
그가 최고의 골프 코스로 꼽는 곳은 세인트앤드루스의 올드코스도, 최초의 골프클럽인 HCEG의 뮤어필드도, 올해 디오픈이 개최되는 북아일랜드의 로열 포트러시도 아니다. 그의 마음속 1위는 미국 조지아주의 오거스타 내셔널이다. 디오픈, US오픈, PGA챔피언십은 매년 다른 곳에서 개최되지만, 마스터스 토너먼트는 매년 같은 곳에서 개최되기에 많은 골프 스토리가 오거스타 내셔널에 축적된다. 그에게 골프는 스토리다.
그에게 마스터스 역사에서 가장 인상적인 순간이 무엇이었냐고 물었다. 그는 타이거 우즈의 2005년 16번 홀 칩샷도, 샌디 레일의 1988년 벙커샷도, 유럽 선수로 마스터스를 최초 우승한 세베 바예스테로스의 세리모니도, 교통사고에서 돌아온 벤 호건의 전설적인 우승 장면도 아니라고 답했다.


그의 선택은 2021년 마쓰야마 히데키의 우승 순간이었다. 스튜어트를 감동시킨 것은 마쓰야마의 캐디 시오타니 시게키가 18번 홀에서 핀을 꽂은 후에 모자를 벗고 골프 코스를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한 장면이었다. 시게키는 이후 인터뷰에서 ‘오거스타 내셔널과 마스터스 토너먼트에 대한 존경과 감사의 의미’로 인사했다고 밝혔다.
이 장면은 골프라는 스포츠가 골프 코스와 자연, 대회 운영진과 골프의 전통을 향한 깊은 존경심을 바탕으로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골프는 단순한 경쟁이 아니라, 경기와 그것을 둘러싼 모든 요소에 깃든 존중이다. 그런 면에서 마쓰야마의 캐디가 보여준 장면은 골프 팬에게 자신이 골퍼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만들었다.
비슷한 장면이 영국 런던 근교의 월튼히스에서 개최된 2023년 AIG 위민스 오픈에서도 연출되었다. 후루에 아야카(일본)는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자, 스탠드 양쪽과 뒤쪽 관중에게 일일이 인사한 후에 골프 코스를 향해 깊이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이 행동은 스탠드에 있는 관중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러한 일본 선수들의 태도는 골프에 대한 일본식 접근 방식을 보여준다. 그들에게 골프 코스는 단순한 경기장이 아니라, 존경해야 할 공간이다. 그 공간의 모든 사람은 존중의 대상이다. 그들의 행동은 단순한 인사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실제로 후루에는 첫 홀 티샷을 치고 페어웨이를 걸어가다가, 티잉 구역에 늦게 도착한 기록원 및 자원봉사자와 악수하지 못한 것을 기억해 다시 돌아와 그들에게 일일이 악수를 청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녀의 경기 스타일은 화려하지 않았다. 인상적인 드라이버 장타, 탄성을 자아내는 아이언샷, 환호를 불러일으키는 롱퍼팅 성공은 없었지만, 그녀는 시종일관 차분하고 실수 없는 경기력을 보여 주었다. 경기력보다 더 중요한 것은 관중과 동반자에게 보여주는 그녀의 배려였다.
이러한 겸손과 존중의 태도를 많은 일본 선수에게서 볼 수 있다. 이는 일본 선수들이 세계 골프계에서 주목받는 이유 중 하나다. 중국의 하이난에서 끝난 블루베이 LPGA에서 다케다 리오(일본)가 이민지(호주)를 누르고 우승했다. 블루베이 코스는 퍼팅 그린 대부분이 이단으로 이루어져 경사가 심했다. 많은 선수가 2퍼팅을 하는 데도 애를 먹었다. 그러나 다케다 리오는 마지막 라운드에서 보기 없이 버디만 8개를 기록하는 완벽한 경기력을 선보였다. 2타 차 선두로 시작한 최종 라운드에서 2위와의 격차를 6타 차로 벌리며 우승을 확정 지었다.

다케다 리오의 플레이 모습에서 마쓰야마 히데키와 후루에 아야카에서 보이는 견고함이 보였다. 그리고 그녀의 성취 뒤에는 단순한 기술력 이상의 힘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마쓰야마 히데키, 후루에 아야카, 다케다 리오 같은 일본 선수들에게서 공통으로 보이는 것은 실력과 견고함이 골프에 대한 경외심과 예의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이다. 영국에서 시작하여 미국에서 발전한 골프가 일본에서 화룡점정한 것처럼 보인다.
폴 스튜어트가 말한 대로, 골프는 스토리의 축적이다. 일본 선수들은 LPGA 리더보드 상단을 대회 때마다 장악하고 있다. 그들은 경기에서 실력뿐만 아니라, 감동적인 스토리와 인상적인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세계 골프계에 앞으로 많은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다. 단순히 총우승 횟수를 늘리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무언가가 골프에 있다.
윤영호 골프 칼럼니스트
윤영호 ㅣ 서울대 외교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증권·보험·자산운용사에서 펀드매니저로 일했다. 2018년부터 런던에 살면서 글을 쓰고 있다. 저서로 ‘옵션투자바이블’ ‘유라시아 골든 허브’ ‘그러니까 영국’ ‘우리는 침묵할 수 없다’ 등이 있다. 런던골프클럽의 멤버이며, ‘주간조선’ 등에 골프 칼럼을 연재했다. 현재 골프에 관한 책을 집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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